폴 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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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 파레는 프랑스의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1886년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1979년에 사망했다. 그는 로마 대상을 수상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포로 생활을 겪었으며, 이후 카지노 드 코트레 악장, 콩세르 라무뢰 지휘자, 몬테카를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등을 역임했다. 1952년부터 1963년까지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며 많은 연주를 남겼으며, 다양한 작품을 작곡했다. 그는 또한 여러 훈장을 받았으며, 아카데미 데 보자르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폴 파레는 노르망디 (센마리팀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조각가이자 교회 오르가니스트였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오케스트라에서 타악기를 연주했고, 루앙에서 음악을 배우며 파리 음악원 입학 자격을 얻었다. 1911년 칸타타 '야니차' (''Yanitza'')로 로마 대상을 수상했다.[3]
폴 파레는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크게 무대, 관현악, 협주곡, 실내악, 피아노, 성악, 합창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각 분야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2. 생애와 경력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프랑스 육군에 징집되었으나 1914년 포로가 되어 다름슈타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현악 사중주곡을 작곡했다.[8]
종전 후 카지노 드 코트레 악단 악장을 거쳐 콩세르 라무뢰를 지휘하게 되었고, 이후 콩세르 콜론과 몬테카를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자도 역임했다.
1922년 발레 음악 '불안한 아르테미스'(''Artémis troublée'')를 작곡했다.[3] 1931년 잔 다르크 승천 500주년 기념 미사곡을 작곡했고,[3] 1935년과 1940년에는 각각 교향곡 제1번과 2번을 작곡하여 콩세르 콜론에서 초연했다.
1939년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하며 미국 무대에 데뷔했다.[3] 1952년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어 1963년 퇴임할 때까지 머큐리 레이블에 많은 연주를 남겼다.[3]
2. 1. 초기 생애 (1886-1911)
폴 파레는 1886년 10월 10일 노르망디 르 트레포르에서 태어났으며,[1] 오귀스트 파레와 그의 아내 오르탕스 피카르의 세 자녀 중 둘째 아들이자 막내였다.[2] 오귀스트는 상아 조각가이자 생 자크 오 트레포르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였고, 마을의 시립 밴드와 극장의 음악 감독이었다.[3] 그는 세 자녀에게 첫 음악 수업을 가르쳤다. 두 아들 모두 루앙 대성당의 성가대에서 노래했는데, 14세의 파레는 성가대를 위해 자신의 첫 마니피카트를 작곡했으며, 그의 전기 작가 데이비드 팻모어는 이 곡이 그 이후로 성가대의 레퍼토리에 남아 있다고 기록했다.[3]
라 마들렌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인 앙리 달리에의 도움으로, 파레는 1904년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하여 자비에 르루에게 화성학을, 조르주 코사드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3] 그는 샤를르 르네프뵈와 폴 비달에게도 사사했다.[4] 그는 피아노, 첼로, 팀파니를 연주했지만,[3] 오르간 연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다. 1907년, 생 세실리아의 날 콘서트를 보도한 L'Ouest-Éclair|뢰스트 에클레르프랑스어는 파레의 오르간 연주가 완벽하다고 특별히 언급했다.[5] 고향에서 멀지 않은 디에프의 보병 연대에서 의무적인 군 복무를 마친 후, 그는 1909년 가브리엘 몽토야가 운영하는 파리의 카바레 데 카트 자르에서 피아노 반주자 자리를 수락했다. 그곳에서 그는 모리스 이뱅을 만났고, 당시 유명한 여러 샹송 가수들과 친구가 되었다.[6]
그는 노르망디 (센마리팀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조각가이자 교회 오르가니스트였으며 아마추어 음악 단체를 이끌었다. 파레는 소년 시절부터 아버지의 오케스트라에서 타악기 연주자를 맡았고, 이후 루앙으로 가서 부르주아 사제와 부르동 사제에게 음악을, 알랭(Haelling)에게 오르간 연주를 사사받아 파리 음악원 입학 자격을 얻었다. 1911년에 칸타타 '야니차' (''Yanitza'')를 제출하여 로마 대상을 획득했다.
2. 2. 로마 대상과 제1차 세계 대전 (1911-1919)
1911년, 파레는 프랑스 최고의 음악상인 로마 대상(Prix de Rome)에 도전하여 칸타타 《야니차》(Yanitza)로 1등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단에는 가브리엘 포레, 카미유 생상스, 샤를마리 비도르, 가브리엘 피에르네 등의 작곡가들이 참여했다.[3] 파레는 20표 중 19표를 얻었다.[7]
로마 대상 수상으로 빌라 메디치(프랑스 로마 아카데미)에서 2년간 거주하며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파리가 귀국한 직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파레는 프랑스 군에 징집되었다.[1] 그는 두 달간의 전투 끝에 포로로 잡혀 1918년 종전까지 다름슈타트 포로 수용소에 갇혔다.[3] 그는 독일인과의 어떠한 음악적 협력도 거부했으며, 가톨릭 및 개신교 포로들을 위한 종교 예배에 맞춰 연주할 하모니움을 제외하고는 악기가 없었다. 종이도 구할 수 없었던 그는 머릿속으로 작곡을 했고, 전쟁 후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구상했던 현악 4중주곡을 악보로 옮겼다.[8]
2. 3. 지휘자 경력 (1919-1952)
석방된 후 파레는 카우테레의 카지노에서 처음으로 전문적인 지휘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에르네의 추천으로 라무뢰 오케스트라에서 파리에서 데뷔했으며[3] 1920년에 부지휘자로 임명되었다.[1] 1897년부터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였던 카미유 슈빌라르는 1923년 5월에 사망했고,[9] 파레가 그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3] 그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5년 동안 머물면서 드뷔시, 라벨, 이베르와 같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많은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을 프로그램에 포함시켰다. 1924년에는 그와 오케스트라가 이베르의 항구들프랑스어을 초연했으며, 이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를 포함한 더 유명한 지휘자들이 연주하게 되었다.[3][10] 그들은 또한 야샤 하이페츠, 나탄 밀스타인, 예후디 메뉴인을 포함하여 파리에서 데뷔하는 여러 유명 솔리스트들과 함께 연주했다.[3]
1928년 파레는 몬테카를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 자리를 수락했고, 여름에는 비시 카지노의 음악 감독을 맡았다. 1933년에는 파리로 이주하여 피에르네의 뒤를 이어 콜론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파리 오페라에서 일하며 ''발퀴레'', ''지크프리트'' 및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포함한 바그너의 오페라 여러 편을 지휘했다.[11] 콜론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동안 파레는 음악 평론가인 에밀 빌레르모즈와 유명한 논쟁을 벌였는데, 빌레르모즈는 1935년에 새로운 교향곡 연주가 자주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파레는 콜론 오케스트라의 무대에서 빌레르모즈를 위선적이고 돈에 눈이 먼 사람이라고 비난했다.[12]
프랑스 정부는 파레를 1939년 세계 박람회에서 프랑스를 대표하여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도록 미국으로 보냈다. 그는 토스카니니와 함께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공동 지휘자 자리를 제안받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려 하자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3] 콜론 오케스트라와 라무뢰 오케스트라는 합쳐 하나의 앙상블을 구성했고, 파레는 외젠 비고와 함께 음악 감독을 공동으로 맡기로 했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 후, 나치 정권은 오케스트라 창립자인 에두아르 콜론이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콜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를 원했다. 파레는 사임했고 점령된 파리에서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시 프랑스의 리모주와 마르세유에서 그는 프랑스 라디오의 오케스트라 내셔널을 지휘했다. 오케스트라의 유대인 단원을 식별하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거절하고 사임한 후 중립국인 모나코로 이주했다.[3] 패트모어에 따르면, 몬테 카를로에서 파레는 많은 음악가들을 도왔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적극적인 일원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파리에 남아있던 다른 음악가들, 특히 샤를 뮌슈와 아르튀르 오네게를 비판했다. 전기 작가 D. 컨 홀로만은 이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시하며, 파레는 몬테 카를로에서 안전하게 머물렀고, 반면 뮌슈와 오네게는 흠 잡을 데 없고 개인적으로 위험한 반 나치 경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에 남아 더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고 썼다. 소송 후 파레는 명예 훼손을 철회하고 사과해야 했다. 홀로만은 파레가 뮌슈에게 품었던 적개심을 뮌슈의 뛰어난 전문성에 대한 "단순한 질투"로 돌렸다.[13]
파레는 1942년에 오랜 연인이었던 욜랑드 팔크와 결혼했다.[14] 파리 해방 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1945년부터 1952년까지 다시 콜론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유럽 투어를 했다. 그는 1949년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매년 초청받았으며, 사망 직전까지 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활동했다. 1951년, 최근 재건된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미국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한 후, 그는 1952년부터 이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3]
2. 4.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 (1952-1962)
1951년, 재건된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미국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한 후, 파레이는 1952년부터 이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3] 그는 처음 3년 동안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했지만, 1956년부터는 디트로이트에 정착했다. 콩세르 콜론을 떠나 (뮌슈가 후임으로 임명됨) 프랑스 방문을 연 2차례의 콘서트 시리즈로 제한했으며, 주로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했다.[8]
디트로이트에서 파레이는 머큐리 레코드사의 새로운 "리빙 프레젠스" 기술 (로버트 파인과 윌마 코자트 파인이 개발)을 활용하여 일련의 음반을 제작했는데, 이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곧 전 세계적으로 배포되었다.[8] 1956년 10월, 그는 자신의 작품인 ''잔 다르크 550주년 기념 미사''를 포함한 프로그램으로 디트로이트의 포드 강당 개관 기념 콘서트를 지휘했다.[15] 1962년 디트로이트의 수석 지휘자 자리에서 은퇴하고 명예 지휘자 칭호를 받았다. 그는 몬테카를로에 있는 자택에서 매년 4주 동안 오케스트라를 위해 돌아왔다.[8]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재직하며 모노럴 시대부터 스테레오 초기의 시대에 머큐리 레이블에 수많은 연주를 남겼다.[3] 유명한 녹음 중 하나로, 생상스의 『오르간이 있는 교향곡』이 있다. 1957년 10월에 이루어진 녹음은 특히 행운이 따랐는데, 파레는 이 작품 특유의 요구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디트로이트 교향악단은 이미 프랑스 최고의 오케스트라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소년 시절 은사이자 친했던 마르셀 뒤프레가 오르가니스트로 초대되었고, 뒤프레 자신도 청년 시절에 생상스 자신의 연주를 최대 목표로 삼았다. 게다가 디트로이트의 포드 오디토리엄에 설치된 오르간은 이 작품에 어울리는 음색이었다. 이 녹음은 음향적으로 오늘날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 교향곡의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연주 중 하나로 꼽힌다.
디트로이트와 더불어 정기적으로 초청받았던 피츠버그, 뉴욕, 필라델피아에서도 파레이는 주류 클래식 작품과 함께 애런 코플런드, 새뮤얼 바버, 네드 로렘, 월터 피스톤 등 미국 및 캐나다 작곡가들의 음악을 지휘하며 만족감을 느꼈다.[8]
2. 5. 말년 (1962-1979)
파레는 프리랜서로서 프랑스와 유럽 본토, 북미 지역의 주요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초청을 끊임없이 받았다. 80세였던 1966년 2월부터 4월까지 미국과 캐나다에서 43번의 콘서트 투어를 통해 오페라 드 몽테카를로 국립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1년 후, 샤를 뮌슈를 대신하여 파리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키예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리가를 방문했다.[8]
1977년 7월, 91세의 파레는 니스에서 마르크 샤갈의 90세 생일 기념 콘서트를 지휘했다. 오랜 친구 예후디 메뉴인이 독주자로 참여한 이 콘서트 직후, 파레는 1979년 10월 10일 몽테카를로에서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유언에 따라 고향인 르 트레포르의 묘지에 묻혔다.[8]
3. 작품
3. 1. 주요 작품 목록
;무대
;관현악
;협주곡
;실내악
;피아노
:# 향수(Nostalgie)
:# 개방(Eclaircie)
:# 자연스러움(Primesaut)
:# 재치와 매력으로(Avec esprit et charme)
:# 열렬히(Ardemment)
:# 꿈꾸며(En rêvant)
:# 정열적으로(Avec fougue)
:# 유연함(Souple)
:# 가벼움(Léger)
:# 부드러움(Tender)
:# 에너지(Energique)
;성악
:# 불성실함(Infidélité)
:# 마지막 잎(La Dernière feuille)
:# 맹세(Serment)
:# 폭풍우 뒤(Après l'orage)
:# 작별(Adieux)
:# 무도회 후(Après le bal)
:# 죽음의 욕망(Dèsir de mort)
;합창
4. 수상 및 서훈
파레는 1950년 아카데미 데 보자르에 선출되었다. 웨인 대학교 법학 박사, 텔아비브 시 메달, 디트로이트, 디에메링겐, 르 트레포르, 모나코의 명예 시민권을 수상했다. 1967년 그리말디 대훈장 최고 훈장인 그랜드 오피서로 임명되었으며, 1971년에는 국가 공로 훈장 그랑 크루아를 수여받았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에서는 생상스, 포레처럼 최고 등급인 그랑 크루아로 승진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Paray, Paul
https://www.oxfordmu[...]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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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Paul Paray
https://www.naxos.co[...]
2007
[4]
간행물
Foreign Notes
http://www.jstor.org[...]
1911
[5]
뉴스
Mayenne
https://gallica.bnf.[...]
L'Ouest-Éclair
1907-11-18
[6]
문서
Mousnier, p. 11
[7]
뉴스
Le prix de Rome de musique
https://gallica.bnf.[...]
L'Ouest-Éclair
1911-07-02
[8]
웹사이트
Paul Paray (1886-1979)
http://www.paulparay[...]
2024-11-09
[9]
웹사이트
Camille Chevillard (1859–1923)
https://data.bnf.fr/[...]
2024-11-09
[10]
문서
Mousnier, p. 27
[11]
팟캐스트
Paul Paray: The art of the great conductor
https://www.gramopho[...]
2022-07-29
[12]
뉴스
A Conductor Denounces a Critic
1935-06
[13]
문서
Holoman, pp. 70–72
[14]
웹사이트
Paul Paray (Conductor, Organ, Composer)
https://www.bach-can[...]
2013
[15]
문서
Slonimsky and Kuhn, pp. 2712–2713
[16]
팟캐스트
Paul Paray: The art of the great conductor
https://www.gramopho[...]
2022-07-29
[17]
뉴스
Paul Paray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79-10-13
[18]
서적
A Ravel Reader By Maurice Ravel
Courier Dover Publications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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